[뮤즈씬]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낙년) 장서각은 2024년 장서각 기획전 ‘사도세자와 두 임금의 시선’을 오는 7일 개최한다.
사도세자(1735~1762)는 영조가 42세에 낳은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로, 영조의 지나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어긋나 결국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는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중심으로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명분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높여 받든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사도세자 사망 후 영조는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하라고 명했으며,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제문과 묘지문에도 세자의 잘못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기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반면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본인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생부 추숭의 의지를 드러냈다. 세손 시절에는 영조에게 간청해 임오화변 관련 기록을 없앴고, 등극 후에는 영조의 뜻을 거슬러 시호를 올리고 묘와 사당을 영우원과 경모궁으로 승격하고, 전례 없이 세자의 태실 가봉과 세자 자손록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사도세자와 관련된 장서각 및 왕실 자료 소장 기관의 자료 57건을 선정해 △효장세자의 사망과 영조의 슬픔, △사도세자의 탄생과 영조의 기대, △사도세자의 일탈과 영조의 절망, △영조의 결단과 영빈 의열의 현창, △정조의 비애와 사도세자 추숭 등 총 5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제1부 <효장세자의 사망과 영조의 슬픔> 에서는 첫째 아들 효장세자(1719~1728)가 세상을 떠나자 요절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히 지은 영조의 행록(行錄)과 지문(誌文), 연보(年譜), 시(詩)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대표 유물로는 영조가 1728년 12월에 손수 짓고 쓴 효장세자 연보를 판목에 새겨 간행한 뒤 녹색 비단으로 장황한 『효장세자 연보』가 있다.
제2부 <사도세자의 탄생과 영조의 기대> 에서는 영조가 갓 태어난 세자에게 걸었던 기대가 혹독한 교육열로 바뀐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세자는 영민한 면모를 보였으나, 10세 무렵부터 공부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에 실망과 분노가 커진 영조가 어린 세자를 훈계하고 교육하고자 지은 글을 소개한다.
대표 유물로는 1743년 3월 17일 관례를 치르는 사도를 위해 영조가 동년 2월에 직접 짓고 쓴 「훈유訓諭」가 있다.
제3부 <사도세자의 일탈과 영조의 절망> 에서는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한 영조와 이를 두려워한 사도세자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던 시기의 일들을 사도세자가 남긴 예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렵 사도세자와 혜경궁 사이에서 태어난 세손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영조는 세자가 아닌 세손에게 훈계의 글을 써주기 시작했다.
대표 유물로는 1761년 4월 8일에 사도세자가 평양에 사는 서필영 자손과 이대심에게 써 준 영지가 있다.
제4부 <영조의 결단과 영빈 의열의 현창> 에서는 사도세자의 일탈과 기행이 극에 이르자 생모 영빈이씨가 아들의 죄상을 고하며 대처분을 요구하고 이에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결심한 자료 등으로 구성했다. 사도세자의 사망 후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례를 간소화하고 처분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역설했다.
대표 유물로는 의열묘 묘역과 그 주변의 지세와 풍광을 실경산수화에 가깝게 그린 <의열묘도>, 영조가 영빈이씨의 의열을 현양하기 위해 찬술한 책 『어제 표의록』등이 있다.
제5부 <정조의 비애와 사도세자 추숭> 에서는 즉위하자마자 생부 추숭의 의지를 드러내며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육체와 혼령이 깃든 공간의 이름을 바꾼 정조의 내용을 다뤘다.
대표 유물로는 경모궁 예제예필 〈무안왕묘비명〉등이 있다.
이번 장서각 기획전은 오는 10월 7일(월)부터 12월 27일(금)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금요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15인 이상 단체관람의 경우 사전 신청을 통해 전시 안내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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