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씬] 매년 수천억 원의 예산이 문화예술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집행된다.

정부와 공공기관은 다양한 공모사업과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예술 생태계의 활성화”를 외친다.

그러나 정작 현장의 예술가들이 체감하는 온도는 낮다. '지원은 넘치지만, 쓸 수 없는 것투성이다.'라는 한 무용가의 말처럼, 문화예술 정책은 과연 창작자 중심인가, 아니면 기관을 위한 시스템인가라는 질문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문화예술 지원사업의 상당수는 기관 운영자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사업의 주체가 문화재단이든, 예술진흥원이나 각 지자체든, 일차적으로 지원을 받는 주체는 대부분 비영리 법인, 예술 단체, 중간지원조직이다.

개인 창작자들은 이들 틀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접근조차 어렵고, 어렵게 통과하더라도 까다로운 행정 절차와 정산 조건 앞에서 창작보다 양식 작성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정책 설계 단계에서도 창작자의 목소리는 종종 실종된다. 자문회의와 포럼, 의견 수렴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 반영은 미미하다.

청년예술가, 독립예술가, 경계지대에 있는 실험적 창작자들은 데이터 속의 숫자로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이 지켜야 할 ‘주체’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는 창작자에게 책임은 묻되, 권한은 주지 않는다.

다행히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사례도 있다.

A재단의 일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행정 부담을 줄이고 창작 중심의 지원을 강화하려 한다.

해외에서는 캐나다 예술위원회처럼 ‘기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창작자에게 직접 지원하는 시스템도 존재한다. 보고서보다 작품이 먼저인 정책 구조, 양보다 창의의 깊이를 보는 심사 기준, 기관 중심이 아닌 예술가 중심의 예산 구조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예술은 단순히 결과물로 환산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을 다룬다.

그러나 지금의 정책은 예술을 실적화하고, 창작을 행정화하며, 상상력을 서류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묻는다. 문화예술 정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책은 예술을 위한 ‘무대’가 돼야 한다. 더는 창작자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조건부 지원이 아닌, 믿고 맡기는 동반자의 정책으로 전환돼야 한다.